백수가 되면서 고정적으로 통장에 입금되던 근로소득이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관심이 있는 일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수익을 얻어보자.' 라는 결심을 하게되어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웬만한 것은 평균 이상으로 해내던 모범생
10대 시절부터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잘 했었다. 반에서는 늘 1, 2등을 했었고 내게 주어진 공부만 열심히 한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 멋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의 꿈은 한결같이 치과의사였다. 이것저것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여러 꿈을 꾸던 아이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되고싶었던 것은 늘 변함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당시에 다녔던 학원의 수학선생님이 나의 수학능력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는지 어머니에게 문과로 진학하도록 설득할 것을 권유했다. 울고불며 이과를 가고싶다고 어머니께 대들었지만 나는 결국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문과를 가게 되었다. (수학 학원을 옮기고 수능을 준비하면서 수능에서 수학은 100점을 맞았다. 단지 잘하는 학생들만을 모아 편법 위주로 가르쳤던 그 선생님의 학원이 나의 성향과 맞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두 번의 수능을 쳤지만 수능 당일 멘탈 관리가 어려워 늘 모의고사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인서울의 상위권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지만 결국 SKY를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학교는 다닐수록 좋았고 다양한 대외활동과 함께 학업 관리도 열심히 해 준수한 학점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원하던 기업에 취직하다.
나는 늘 문화, 예술에 흥미가 있었기에 일을 하게 된다면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여러 곳의 기업들을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대중문화를 다루는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같은 회사의 동기가 되고,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면서 애사심은 날로 커져갔다. 원하던 곳으로 취업을 했다는 기쁨에 차 신입사원 시절에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회사 건물에서 아이돌과 연예인을 볼 수 있고, 직원들이 자유로운 옷차림으로 지나갈 때면 '정말 나에게 잘 맞는 회사를 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방향을 잃은 직장생활
한 채널의 편성팀에 배치를 받고 편성업무를 해나가면서 내 안에서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보고서 작업, 기계적인 단순반복 업무에 조금씩 지쳐갔고 그 안에서 나오는 자잘한 실수들은 선배들의 잔소리를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다양한 외부 변수가 작용하는 시청률, 그리고 그것으로 결정되는 나의 성과가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게 되는 자기비하적 성향은 나를 자꾸만 우울감으로 밀어넣었다. '이렇게 힘든 상태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지경에 다다르자, 어렸을 때 늘 이루고싶었던 그 꿈이 다시 떠올랐다.
퇴사를 결심하고 전문직에 도전하다.
그래, 치의학전문대학원에 도전해보자. 내가 얼만큼의 합격 가능성이 있을지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다짜고짜 부모님께 선언했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싶어했던걸 아셨기에 도전을 격렬히 반대하지 않으셨다. 다만 걱정하셨을 뿐. 그저 도전의 의미로 회사와 함께 병행할 것을 권유하셨다. 그에 대해 명확히 대답하지 않고 일단 몇 달간은 회사일과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학점은행으로 생물, 화학, 물리를 수강하고 텝스 인강을 들으면서 문제집을 풀었다. 다행히 회사에서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를 하면서 퇴근 후에 바로 독서실을 가는 것이 가능했다. 새벽까지 텝스 공부를 하고 돌아와 잠을 자는 것, 그것이 나의 루틴이었다.
약 반년동안 텝스 시험을 수차례 치면서 점수를 만들었고, MD단기 프리패스를 결제해 본격적으로 MDEET를 준비했다. 텝스 준비를 마치면서 퇴사를 결심했고, 그렇게 나는 수입이 없는 수험생 신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년이 되지 않는 기간동안 MDEET를 준비하면서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문과생이라는 신분이었다. CH4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이과생들도 힘들어하는 시험을 준비해야하니 그 시작이 만만치 않았다. 인강을 듣고,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서 그 개념들을 느리지만 채워나갔고 맞출 수 있는 문제도 한두개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문대학원 진학 실패, 그 이후
하지만 나의 발목을 잡는 것은 다름아닌 학벌이었다. 현재 치의학전문대학원은 전국에 3개뿐이었고, 한창 많은 학교들이 치전원을 모집하던 시기와 달리 합격생을 뽑는 과정에서 출신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비교적 정량대로 알려진 전남대학교가 있어 이를 목표로 삼고 열심히 준비했다.
1차에서는 학점과 영어점수라는 정량적 요소와 그 외 정성적 요소로 합격이 결정되었는데, 학점과 영어점수는 전남대학교의 지난 3년 간 합격자의 평균값과 비교했을 때 부족함이 없어 1차는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전남대학교는 학벌을 포함한 정성적 요소의 반영을 확대하는 추세였고 그 흐름에 맞춰 나와 같은 지원자는 미련없이 불합격시켰다.
2년까지 준비해보겠다는 나의 결심은 1차 불합격과 함께 그대로 꺾였다. 1년을 더 준비해본다한들 나의 출신 학교와 문과생으로서 해온 활동들, 그리고 서른이라는 나이는 그들에게 여전히 매력이 없을 것이기에... 슬프게도 나의 오랜 꿈은 이렇게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설마 일어날까 싶은 상황이 일어나고 나는 수입이 없는 백수가 되었다. 가족을 포함해 주변인 모두 당분간은 푹 쉬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서른에 수입이 없는 상태는 생각보다 멘탈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불안함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나의 미래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사로 되돌아가고싶지는 않았다. 물론 일 년이라는 공백을 가진 서른살 여자가 그럴듯한 회사에 재취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재취업이 가능하더라도 회사라는 조직으로 돌아가고싶지는 않을 정도로 조직생활에 마음이 많이 떠난 상태였다. 단순히 불안감에 다시 회사를 들어가게 된다면 똑같은 고민으로 괴로워하면서 다시 퇴사하고 현재의 상태가 되기를 반복할 것만 같다.
(본업은 없지만) 우선 부업을 해보자. 블로그부터 시작해봐야지. 하면서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고 약 두 달을 운영하면서 현재 애드포스트 승인까지 받은 상태다. 여러가지 책을 읽고, 영상을 보면서 돈을 버는 방법은 직장인으로서 받는 근로소득 외에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나를 찾아오는 불안감 속에서 꾸준히 도전하려는 마음을 놓치지 않고자 이 블로그를 열게 되었다. 이 곳에는 내가 책을 통해 배운 지식들, 영상을 통해 익히는 기술들, 그리고 나의 감정에 대해 기록할 예정이다. 이 블로그 또한 하나의 수익 파이프라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나만의 무기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ZZIN 디지털 노마드 창업> 직장생활만이 정답은 아니다! (0) | 2022.12.05 |
---|---|
자청의 <역행자> 북콘서트/강연회를 다녀왔다. (1) | 2022.12.02 |
맥북 비주얼 스튜디오 코드와 파이썬 설치 및 다운로드하는 법(Python & Visual Studio Code) (0) | 2022.12.01 |
[포토샵] 누끼 따는 법: 레이어 마스크(layer mask) (0) | 2022.11.29 |
[포토샵] 누끼 따는 법(사진의 배경 지우기): 선택도구 사용 (0) | 2022.11.28 |